SiliconValley KoreaTV.Radio 다이아나 기자 |
ⓒ 닛칸스포츠
일본 프로야구(NPB) 드래프트 1차 지명은 지역, 연고에 관계없이 모든 구단이 특정 선수를 동시에 지명할 수 있다. 때문에 우수한 선수가 등장하면 모든 구단이 1차 지명하고 우선 교섭권을 얻기 위해 제비 뽑기를 하는 진풍경도 간간이 연출된다. 다만 여기에는 큰 리스크가 존재한다. 제비 뽑기에 승리해 교섭권을 얻더라도 선수가 입단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러 선수가 본인이 원하는 구단에 가기 위해 1년 재수도 서슴지 않는다. 확률과 선수 마음을 동시에 얻어야 최종 승자가 되는 구조인 셈이다.
11년 전 일본에 역대급 재능을 가진 선수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투수로 160km의 강속구를 던지고 타자로도 초고교급으로 평가되는 ‘유니콘’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12개 프로 구단 중 11개 팀이 이 선수를 지명하지 않았다. 선수의 마음은 일찌감치 미국 메이저리그(MLB)에 가 있었고, 현지 명문 구단에서도 높은 관심을 표명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선수는 거취를 묻는 질문에 “일본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아도 메이저리그 도전을 할 것”이라 못을 박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좋은 선수는 지명해야 한다’는 모토를 내세우는 한 구단만이 1차 지명을 해 교섭권을 얻었다. 직전 해 같은 접근으로 실패를 겪었던 팀이었기에 원하는 결과를 얻을 거라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구단은 각고의 노력 끝에 선수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한다. 선수의 이름은 ‘오타니 쇼헤이’, 구단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이다.
ⓒ 日本ハムファイターズ, Nippon-Ham Fighters
닛폰햄 파이터스는 오타니를 설득하기 위해 30장에 이르는 PPT 자료를 작성해 전달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타니가 구단 관계자를 만나지 않으려 했으나 칠순을 앞둔 단장과 선배 야구선수의 간곡한 부탁에 만남의 자리가 성사됐다. 구단이 작성한 자료는 선수 입장에서 작성한 리포트였다. ‘오타니 군의 꿈으로 가는 이정표’란 제목의 자료에는 일본과 한국 프로리그에서 경험을 쌓은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전하고 있다. 아울러 오타니의 롤모델인 다르빗슈 유가 착용했던 등번호 11번과 투수와 타자를 겸하는 ‘이도류’ 육성 플랜 등도 제시되어 있다. 선수가 정말 바라는 것(성공적인 메이저리그 진출)과 구단이 원하는 것(자국 리그 성적 및 흥행)에 접점이 있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오타니도 후일 본인이 생각하지 못 한 부분이 명시되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오타니는 마음을 돌려 2013년 닛폰햄 파이터즈에 입단해 첫 해부터 투타겸업으로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2016년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퍼시픽리그 MVP를 차지했다. 이후 포스팅시스템을 통해 닛폰햄 구단에 거액의 이적료를 안겨주고 2018년 메이저리그 로스앤젤리스 엔젤스로 이적한다. 그의 행보는 센세이션 자체였다. 진출 첫 해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을 수상한 후, 2021년에는 만장일치로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고, 2022년에는 15승과 30 홈런 및 규정 이닝과 규정 타석 동시 달성 등 진기록을 달성하였다. 2023년에는 투수로 10승, 타자로 44 홈런을 기록하며 투수가 홈런왕인 상황을 연출했다. 그리고 MLB 역사상 최초의 만장일치 MVP 2회 수상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프리에이전트(FA) 시장 기록을 갈아치울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행보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2023 디데이 올스타전 투자사 배틀 현장 ⓒ플래텀
최근 오타니와 닛폰햄 파이터스 사례가 떠오르는 이벤트가 국내서 열렸다.
지난 29일 열린 ‘2023 디데이 올스타전’ 행사에서 투자사(VC)가 무대에 올라 스타트업 관계자로 구성된 관객에게 평가를 받는 ‘투자사 배틀’ 이벤트가 열렸다. 보통 스타트업이 발표를 하고 투자사가 심사를 하는 형식을 반대로 비튼 ‘역배틀’ 형식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잊고 있었다. 투자사가 스타트업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스타트업도 투자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스타트업이 투자사를 ‘골라서’ 투자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스타트업은 극소수다. 스타트업이 구애를 하고 투자사가 받아들이는 형식이 다수인 것이 현실이다. 스타트업과 투자사의 관계를 연애나 결혼생활로 비유하는데, 일방적인 짝사랑을 통해 혼사가 결정되는 셈이다. 그래서 투자사에게 투자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가 공식처럼 돌아다닌다. 물론 비즈니스를 하기 위한 전략적 접근이기에 비판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이날 발표자 모두가 데모데이 등에서 심사위원, 혹은 멘토로 초빙되는 유명 인사들이다. 투자사들은 자사의 설립 배경, 투자 철학을 비롯해 인적구성, 포트폴리오 구성, 성공 투자 사례 등 왜 본인들에게 투자를 받아야 하는 지를 설명했다. 경쟁 PT 방식이었으며 관객은 투표 컨트롤러로 선택할 수 있었다.
과거에 같은 콘셉트의 피칭 행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번 행사는 단순한 이벤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승한 투자사에게 15억 원 규모의 디캠프 출자 우선 검토 및 1월 디데이 공동 주관사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는 점이 달랐다.
1부 예선과 2부 결선으로 진행된 무대에는 매쉬업엔젤스, 에트리홀딩스, 시리즈벤처스, 노틸러스인베스트먼트, 더벤처스, 소풍벤처스, 스파크랩, 캡스톤파트너스 등 8개 사가 참여했다.
투자사가 자신을 어필하고 가장 매력적인 투자자를 청중이 직접 선정하는 ‘투자사 배틀’에 나선 8개 벤처캐피털. (왼쪽 위부터) 박은우 매쉬업엔젤스 파트너, 김일태 에트리홀딩스 책임심사역, 김형철 시리즈벤처스 수석심사역, 조현흠 노틸러스인베스트먼트 이사, 김철우 더벤처스 대표, 한상엽 소풍벤처스 대표, 김호민 스파크랩 공동대표, 송은강 캡스톤파트너스 대표 ⓒ플래텀
보통 IR(Investor Relations)은 투자자들과 관계를 맺는 행위로, 투자를 염두에 둔 스타트업에게는 넘어야 할 산 중 하나라고 한다. 이날 무대에 오른 투자사들은 스타트업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주제를 IR에 담았다. 일부 투자사는 LP(limited partner)를 상대하듯 포트폴리오와 성공사례, 숫자에 주안점을 뒀고, 어떤 투자사는 창업자와의 관계 등 스토리에 방점을 찍고 피칭을 진행했다. 하우스만의 강점을 드러내되, 파트너라는 측면에서 인간적인 모습도 어필했다. 이벤트적인 측면에서 랩을 하거나 본인의 전화번호를 장표에 공개한 발표자도 있었다.
투자사 배틀 결선 무대에 선 김철우 더벤처스 대표(왼쪽)와 송은강 캡스톤파트너스 대표(오른쪽) ⓒ플래텀
결선에는 송은강 캡스톤파트너스 대표와 김철우 더벤처스 대표가 올랐다. 두 사람은 참가자들로부터 8개 키워드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결선을 치렀고 실시간 관객 투표를 통해 최종 우승은 김철우 더벤처스 대표가 차지했다. 경쟁 PT라고는 하지만 축제처럼 진행된 행사는 관객의 높은 호응 속에 마무리됐다.
김철우 대표는 “PT를 하는 스타트업의 마음을 새삼 알 수 있는 자리였다.”며 “창업자 입장에서 고민하고 실행한다는 것을 주제로 잡고 발표했다. 무엇보다 창업자들로부터 투표를 받아 1등을 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의미 있게 느껴진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김철우 더벤처스 대표가 우승 세리모니를 하고 있다. ⓒ플래텀
이날 발표를 진행한 투자사들은 펀드 규모, 투자 단계, 인적 구성에서 각각의 강점과 특색이 있는 하우스들이기에 순위를 매기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더벤처스의 우승으로 요즘 스타트업이 바라는 투자사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있겠다. 추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유형, 즉 이상형을 반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더벤처스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호창성·문지원 공동대표가 설립한 더벤처스는 ‘창업자를 돕는 창업자’를 표방한다. 2014년 액셀러레이터로 출범한 이후 국내 및 동남아시아 초기 투자에 주력하며 매년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다. 더벤처스에서 첫 투자를 받은 후 엑싯에 성공한 ‘셀잇’의 공동 창업자 김철우 대표가 2020년 신규 파트너로 합류, 2021년 더벤처스 국내 대표로 취임해 창업자 중심 투자 및 창업자 커뮤니티 조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엑시트를 경험한 창업자 출신으로 인적 구성이 되어 있기에 스타트업의 고충을 잘 이해하고 투자유치 이후에도 경험에서 나온 코칭이 가능한 점이 어필 포인트이다. 최대 일주일 이내 투자 검토 결과를 회신하는 것이 원칙인데, ‘기다려 달라’는 투자자의 반응에 지쳐본 창업자들은 이에 호응했다.
김철우 대표는 발표에서 “우리 구성원 모두가 창업자였다. 그래서 투자 프로세스도 스타트업 입장에서 고민해서 만들었다. 연락이 오면 100% 회신한다. 검토 시간도 투자자의 일방적인 선택이 아니게 했다. 정식 검토 프로세스를 진행하면 일주일 이내 답을 한다. 한국에서 제일 빠르다고 자부한다.”라고 말했다.
투자사의 사후관리는 중요하고 필요하다. 스타트업도 단순히 재무적 투자만을 바라고 손을 잡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는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종종 과하게 느껴지는 투자사의 요구사항은 부담으로 느껴진다. 더벤처스는 창업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지만 먼저 손을 내밀면 적극적으로 맞잡는다는 접근법이다.
2023 디데이 올스타전 투자사 배틀 현장 ⓒ플래텀
김 대표는 “투자를 하고 나면 스타트업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가 제일 중요할 거다. 우린 포트폴리오사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대신에 도움을 요청하면 모든 리소스를 총동원한다. 창업을 해봤기에 이 길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 여정인 줄 십분 이해한다. 그 길을 먼저 가본 든든한 친구가 있다면 좋지 않겠나. 우리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우리가 투자한 180개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커뮤니티가 함께 도움을 준다.”고 전했다.
더벤처스는 여타 투자사들과 차별화되는 독특한 행보들도 보였다. 국내 벤처캐피털 최초로 창업자간 정보교환 및 소통을 위한 커뮤니티 앱 ‘더벤처스(TheVentures)’를 출시했다. 창업자들끼리 소통하며 실질적인 정보를 얻고, 정보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또한 초기 또는 예비 창업팀이 온라인으로 빠르게 시장을 검증할 수 있는 ‘더벤처스 온라인 스프린트’를 런칭하고, 스타트업 추천 프로그램인 ‘오픈리퍼럴’을 도입하는 등 초기스타트업들과의 접점을 늘이는 시도를 해왔다.
글로벌에도 진심이다. 호창성, 문지원 대표는 싱가포르, 김대현 파트너는 베트남에 상주하며 현지 투자 및 국내외 연결을 도모하고 있다. 더벤처스는 한국을 포함해 12개 국가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김 대표는 “이것만 기억해 달라. 더벤처스는 엑시트를 경험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고, 친구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젊은 팀이다. 창업가 커뮤니티와 글로벌 네트워크가 있으며 투자 성과도 나쁘지 않다.”라는 말로 발표를 마무리했다.
투자사에 대한 정보는 대중에게 많이 공개되어 있지 않다. 투자사를 평가하는 몇몇 블라인드 서비스가 있지만 그것만으로 해당 VC의 면면을 파악하긴 어렵다. 일부 투자사는 브랜딩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알리려 노력하지만,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하우스도 존재한다. 투자사 배틀은 정보 불균형 바늘을 조정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이런 시도가 더 많아져서 창업자와 투자사가 서로에게 더 맞는 파트너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