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TV.Radio 제임스 유 기자 | ‘축구 황제’ 펠레(82)가 세상을 떠났다. AP통신, 로이터통신 등 현지매체들은 30일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펠레가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펠레가 치료를 받고 있던 브라질 상파울루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병원은 “그가 앓던 질병들과 암 진행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부전이 사망 원인”이라고 밝혔다. 지난해부터 대장암으로 투병했던 펠레는 한 달 전부터 병세가 나빠져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펠레는 18세였던 1958년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해 스웨덴 월드컵에서 6골을 넣으며 최연소 우승 및 신인상, 최연소 해트트릭 등 각종 기록을 새로 써 내렸다. 사람들은 이 10대 소년을 ‘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펠레는 1962 칠레,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다시 쥘리메 컵(월드컵 트로피)을 들어올리며 월드컵에서 3번 우승한 전무후무한 선수가 됐다. 펠레의 업적을 말할 때면 이 기록이 가장 먼저 나오곤 한다. 펠레는 1957년부터 1971년까지 브라질 대표팀에서 활약하며 77골을 넣었다. 브라질 역대 A매치(국가대항전) 최다 골 기록이다.
펠레는 브라질 클럽 산투스FC에 헌신했다. 1956년 산투스에서 프로 데뷔해 1974년까지 쭉 한 클럽에서 뛰었다. 그는 산투스에 수많은 리그 우승 트로피를 안겼고, 유럽의 챔피언스리그에 해당하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2연패하기도 했다. 펠레는 산투스에서의 생활을 정리한 후 미국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해 3시즌을 더 뛴 뒤 은퇴했다. 비록 펠레가 뉴욕에서 뛴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구단은 펠레의 10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펠레는 개인 통산 1200골 이상을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펠레는 현역 생활동안 최고의 축구 선수에게 주는 상인 발롱도르를 받지 못했다. 과거 발롱도르는 유럽 국적의 선수들에게만 수상 자격을 줬기 때문이다. 1995년 이같은 국적 제한이 폐지됐고, 2013년 과거의 활약을 종합해 펠레에게 발롱도르 명예상이 돌아갔다. 펠레는 “은퇴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날 기억해 주는 것에 감동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이처럼 펠레는 현역 생활 이후에도 상을 받을 정도로 그의 활약은 긴 여운을 남겼다. 축구계의 신성이 떠오를 때면 늘 ‘펠레만큼 하느냐’는 질문이 따라 나올 정도로 펠레는 축구의 기준이기도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펠레를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로 선정하기도 했다. 펠레는 축구 종목을 넘어 세계 최고의 스포츠 선수였다. 은퇴 후에는 브라질 체육부 장관을 맡아 브라질 축구 선진화에 힘썼다는 평을 받았다.
펠레는 지난해 9월 오른쪽 결장에 암 종양이 발견돼 제거 수술을 받았다. 이후 병원을 오가며 화학치료를 받다가, 지난 11월 심부전증을 앓고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등 증상이 악화돼 재입원했다. 또 펠레는 최근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은 후 호흡기 질환도 겪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전 세계가 펠레의 쾌유를 기원했다. 브라질 선수·관중들은 경기장에서 펠레의 얼굴이 그려진 대형 현수막을 들고 그의 쾌유를 기원했다. 과거 펠레와 설전을 벌이다 “펠레는 이제는 입에다 신발을 넣어야 할 것”이라며 강도 높은 비난을 했던 호마리우(56)도 “왕이시여, 쾌차하길. 전 세계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며 회복을 기원했다. 하지만 펠레는 수많은 이들의 응원 속에도 마지막 숨을 거뒀다.
지난 19일 아르헨티나가 프랑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자 펠레는 “리오넬 메시의 첫 월드컵 우승은 그의 수준에서 마땅한 결과. 디에고 마라도나가 (하늘에서) 웃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르헨티나 축구의 전설 마라도나는 지난 2020년 세상을 떠났다.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프랑스의 킬리안 음바페를 두곤 “이런 축구의 미래를 보는 건 대단한 선물”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후배들의 활약은 펠레가 생전 받은 마지막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