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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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보다 빛난 매너" 오상욱이 내민 손, 세계가 열광했다

펜싱 결승 오상욱 금메달

 

 

KoreaTV.Radio 제임스 유 기자 |  27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파리 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개인전 결승. 오상욱(28)은 파레스 페르자니(튀니지)에게 14-8로 크게 앞서 있었다. 한 점만 더 내면 금메달을 확정할 수 있었던 순간. 심판이 ‘알레(allez·공격 시작)’를 외치자 오상욱이 다가갔다. 무슨 영문인지 페르자니는 가만히 서 있었다. 사실상 무방비 상태. 하지만 오상욱은 다급하게 공격하지 않았다. 천천히 다가가며 움직이지 않는 상대를 지켜봤다. 페르자니는 뒤늦게 ‘알레’를 듣지 못했다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고, 심판은 경고를 준 뒤 경기를 재개했다. 오상욱이 재빨리 공격했다면 득점으로 인정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오상욱은 그러지 않았다. 페어플레이 정신을 발휘한 셈이었다.

 

이후 다시 ‘알레’가 선언되자 오상욱은 과감하게 전진했다. 이번에는 놀란 페르자니가 오상욱 공격을 피하려 다급하게 뒷걸음질치다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긴장된 순간에 나온 황당한 페르자니의 모습에 맥이 빠질 법도 했지만, 오상욱은 페르자니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웠다. 이때 심판이 알트(halte·멈춰)를 선언해 공격해도 점수가 올라가진 않았겠지만 무조건 공격하기 보단 상대 곤경을 우선 배려하는 자세가 돋보였다. 관중석에서도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잇따른 해프닝에 오상욱은 다소 흔들렸다. 연속으로 점수를 내줘 14-11, 3점 차까지 추격당했다. 14-5부터 무려 6점을 연달아 내준 위기였다. 그때 “널 이길 사람은 없어!” 외침이 들렸다. 원우영(42) 코치 목소리였다.

 

파레스 아르파(캐나다)와 8강전에서도 흔들리던 오상욱을 잡아준 그 한마디. 순간 힘을 얻은 오상욱은 오른쪽 다리를 앞으로 쭉 뻗는 특유의 런지(lunge) 동작과 함께 상대 가슴에 칼을 찔렀다. 15대11. 승리가 확정되자 오상욱은 원 코치에게 달려가 안겨 함께 환호했다. 원 코치는 그랑 팔레에서 펼쳐진 2010년 세계선수권에서 아시아 최초로 남자 사브르 개인전 금메달을 따낸 전설. 2012 런던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 멤버이기도 하다. 이날 경기장으로 오는 길에도 그는 오상욱에게 “여기에 내 기운이 있으니 잘될 거야”라고 기운을 북돋웠다.

 

도쿄 올림픽 단체전에 이어 올림픽 두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건 오상욱은 한국 사브르가 자랑하는 세계적 스타다. 대학 시절까지 펜싱 선수를 하다 은퇴한 친형 오상민(30)씨 영향으로 대전 매봉초 6학년 때 펜싱에 입문했다. 3형제 모두 키가 185㎝가 넘는데, 그 중 오상욱이 192㎝로 가장 크다.

 

어렸을 땐 몸집이 작았다. 중1 때까지 160㎝대 초반이었다가 송촌고에 진학할 당시 187㎝까지 컸고, 고1 때 190㎝를 넘었다. 오상민씨는 “상욱이가 어린 시절 부족한 체격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더 빠르게 스텝을 밟는 등 기본기 훈련에 매달렸는데, 키가 갑자기 크면서 피지컬과 스피드를 모두 갖춘 무시무시한 선수가 됐다”고 말했다.

27일(현지시각) 오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2024파리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개인 결승 한국 오상욱과 튀니지 페레스 페르자니의 경기. 오상욱이 공격 후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14년 한국 사브르 최초로 고교 국가대표가 된 오상욱은 긴 리치(205㎝)와 다리를 활용해 깊게 찌르고 베는 기술로 2018-2019시즌부터 두 시즌 연속 세계 랭킹 1위에 오르며 일찌감치 최강자로 군림했다. 공격은 물론 수비에도 능해 막고 찌르는 기술인 ‘파라드 리포스트’로 상대를 농락했다. 서양 선수들은 세계 무대를 휩쓰는 이 젊은 검객을 ‘괴물(monster)’이라 부르며 경탄했다. 그는 2021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코로나에 걸려 7㎏ 이상 체중이 빠지며 고전했지만, 실전에선 막내 에이스로 활약해 김정환과 구본길, 김준호와 단체전 금메달을 합작했다. 그때 한국 대표팀에 붙은 별명이 ‘어펜저스’(어벤저스+펜싱). 오상욱은 개인전에선 산드로 바자즈(조지아)와 벌인 8강전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에 1점을 잃으면서 13대15로 패배, 아쉬움을 남긴 채 3년 후를 기약했다.

 

도쿄 이후 파리로 오는 동안 시련이 많았다. 2022년 12월 연습 경기 도중 실수로 상대 발을 밟아 오른쪽 발목이 꺾이며 인대가 파열됐다. 바깥쪽 인대 두 개는 완전히 끊어졌고 하나도 50% 이상 손상됐다. 펜싱을 시작한 이후로 가장 큰 부상이었다. 수술 후 힘든 재활 과정을 이겨낸 오상욱은 작년 항저우 아시안게임 개인전과 단체전을 석권하며 부활을 알렸다.

 

올해 초엔 상대와 부딪치며 칼을 잡는 오른 손목 인대를 다쳤다. 깁스를 하고 한동안 훈련을 못했다. 국제 대회에 가는데 여권을 가져왔느냐고 하면 공항에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아, 맞다’라고 하는 등 별명이 ‘아맞다’일 정도로 무덤덤한 성격인 그였지만, 부상이 잦아지자 생각이 많아지고 움츠러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상대가 막든 말든 줄기차게 찔렀을 텐데 부상 이후 막히면 그쪽을 피해 다른 곳을 노리는 모습을 보고 형이 ‘승부를 피하지 말고 그냥 덤벼들던, 내가 알던 그 동생으로 돌아오라’고 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그의 파리 올림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상욱은 구본길·박상원·도경동과 함께 31일 남자 사브르 단체전에서 올림픽 3연패에 도전한다. 한국 펜싱 사상 첫 2관왕도 눈앞에 있다. 오상욱은 “함께 이뤄내고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기쁨이 있어 단체전이 우승의 맛이 더 좋다”며 “얼른 끝내고 푹 쉬고 싶다”면서 웃었다.